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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투더와하나드] Meaning o ??
    카테고리 없음 2020. 1. 31. 22:15

    ※스포츠 1러시아 한 사발※​ 여행을 정 이야기 괜찮은 친구가 권하고 준 영화였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지도 높고 동시에 평이 좋은 영화라고 소개 받았는데, 2시 노노 20분이라는 매우 나는 러닝 타이 다이 주는 압박감에 선의의 손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좋은 영화를 소개했으니 어서 관람하고 후기 리그를 공유하라'는 추천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무려'크리스틴 스튜어트'라고 하는 세상 사랑하는 배우의 출연을 차마 무시할 수 없어 2시 노노 20분을 투자하고 보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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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어떻게 하나 2년 전 영화입니다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질감은 없었다. 오히려 영화가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아마 가끔 이 흐름이라고 해도 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연출 자체도 매우 촘촘하게 짜여져 있습니다.새가 좋은 편이라 하나 40분이라는 러닝 타이입니다. 전혀 지루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영화가 끝났는지 또 다른 문제점이 남았다.


    인투자와 하나도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배경으로 하면 당연히 결미는 정해져 있다. 맥캔들리스는 죽는다 그의 대나무 소리는 명백한 사실이다. 감독의 방책이 투영될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의 대나무 소리가 아니라, 그가 '죽소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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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도 자신은 있지만 맥캔들리스는 죽기 직전 그가 평소 즐겨 읽던 닥터 지바고 중 unshared happiness is not happiness(공유되지 않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라는 문구 위에 해피핀ESS ONLY REAL WHEN SHARED(행복은 공유해야 현실이 된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I HAVE HADA HAPPY LIFE(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라고 하는 꽤 자신의 만족스러운 유언이 아닌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사실 맥캔들리스가 어느 최후를 맞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가 남긴 흔적을 통해 그의 최후를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문구보다는 'HAPPINESS ONLY REAL WHENSHARED'라는 문구에 철저히 초점을 맞췄다. 행복을 찾아 호쾌하게 알래스카로 향하던 청년은 알래스카 한복판에서 영양실조와 중독 증세로 죽어가는 가운데 비로소 행복은 누군가와 함께 자신을 나누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의 대나무 소리는 이상향 끝에 행복을 찾은 모습이 아니라 극도의 불안과 후회, 고합격의 외침만이 가득 찬 끔찍한 최후가 된 것이었다. <이것이 감독이 그린 이 영화의 결국였다..도대체 왜그럴까?>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왜곡할 수는 없어도 되는 일이라고 꿈 많은 청년이 안타깝게 죽었다 본인이 꿈꿨던 곳에서 안식을 찾았다는 정도로 충분히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참 고민한 끝에 영화를 몇 차례 자신에게 되돌린 끝에 마침내 자신의 마 감독의 의도를 알아챌 단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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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we admit that human life can beruled by reason, then all possibility of life is destroyed.(이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삶의 모든 현실성은 파괴된다.)극중 맥캔들리스가 콜로라도 강에서 무면허 카약라이딩을 즐기며 읊는 인용구다(찾아보니 톨스토이의 저서 전쟁과 평화 속의 문구라고 한다). 위의 글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이론이 떠올랐다. '코끼리의 알맹이 이론'으로 유명한 'The Elephant Theory'는 서커스단에서 어린 코끼리를 내용물을 묶어두면 성체가 되어 내용물을 빼내는 힘이 생겼다고 해도 이를 빼내지 못하고 속 주변을 멘도는 코끼리에서 착안한 이론이다.즉 인간 또한 스스로의 한계를 정의하고, 이에 반복된 좌절을 거듭하면 훗날 이를 극복할 능력을 갖추게 되더라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맥캔들리스가 '삶의 현실성'에 대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코끼리 속 이론'을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맥캔들리스는 속을 도려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알맹이를 깎고 야생을 뛰어다니는 코끼리가 그렇지 않은 코끼리에 비해 더 행복한 코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 뿐 실제로 속을 깎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더 큰 문재는 정작 네용토우크을 뽑는다 하더라도' 제2의 멕켄도우루리스'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당장 여기에 감독의 계획이 녹아 있다.사람들은 서커스 코끼리보다 야생 코끼리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는 점은 야생 코끼리는 먹을 풀이 없어 굶어죽거나 나쁘지 않게 맹수나 밀렵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의지에서 오는 행복은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기아와 천적의 위협으로부터 코끼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나쁘지 않은 몸일 뿐이다. 감독은 맥캔들리스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이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얼마나 나쁘지 않고 어이없고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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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감독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것이 "위험하니까 이야기는 꺼내지 마!" 등 전혀 없다. 단지,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허리를 자르고 야생을 뛰어다니는 코끼리의 모습이 언뜻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하루 더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인내하며 자신 있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야기의 토대를 빼버리고 싶다면 나 혼자 철저히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멘토가 있다. "잘 될 거야. " 할 수 있어. " 기운을 내라. 라고 힘을 북돋우고, 매우 매운 타입과 "눈에 띄기도 해. '그래도 해볼래?' 라고 물어보는 유형. 감독은 아마 철저히 후자에 해당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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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야 어떻든 그 계획만은 높이 평가할 수 있는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의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영화를 몇 번 뒤집고 그에 관한 많은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도 그는 위대한 모험가인지 오만한지 쉽게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지도도 없이, 설악산을 등산, 등산객의 휴게소 500m 떨어진 곳에서 조난한 채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그를 멍청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자기도 그런 것 같아. 그러나 그것이 산 속에만 대한민국이 된다는 말인가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이 그렇다. 한 걸음 떨어져 보면 그대는 무자신하고 명쾌하지만 그 가운데서 거센 풍파에 직면하는 가운데라면 어떤 것이든 쉬운 처음이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죽음을 맞았는데도 맥캔들리스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감독은 고란 맥캔들리스의 삶을 단순 미화해 그는 비범하고 위대했고 언제 자기 옳았다는 상투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더 깊은 고찰과 울림을 전하려 했는지 모른다.VIVA_인투자와 첫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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